월간지 201-250 238호 제3부 성경에 기록된 죄의 정의

제3부 성경에 기록된 죄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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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죄의 정의를 바로 아는 것의 중요성

죄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타락한 본성 자체를 죄라고 간주한다면, 죄 된 본성이 제거되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우리는 죄를 정복할 수 없고 죄에 대한 승리와 극복은 허망한 환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참된 회개와 거듭남은 우리 가운데서 희귀한 경험이 되고 맙니다. 물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악한 것이고 죄 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정죄(멸망)를 선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멸망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지게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효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정의를 “죄는 불법이라”는 요한일서 3장 4절의 말씀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죄짓기를 중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필요성과 중요성과 가능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됨과 연약함을 더욱 더 깊이 느끼게 됨으로써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간구해야 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상은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뿌리는 로마 천주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개신교에 스며들었고, 그리하여 많은 교회는 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원죄설은 죄에 대한 정의를 “우리의 타락한 본성,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 유혹을 받았을 때 옳지 못한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 자체가 죄”라고 말하면서 죄를 정복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백성을 낙담케 만들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가르침을 구원에 불필요한 구시대의 율법주의적 유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을 죄짓고, 용서 받고, 죄짓고 용서 받는 영적 악순환 속으로 유인하여 결국에는 세속과 타락의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거짓된 평안 속에 머물도록 기만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죄의 정의

성경은 “죄”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는 우리가 죄 된 본성을 유전적으로 받았다고 해서 정죄를 받은, 즉 존재 때문에 멸망을 받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기를, “하나님, 나는 내 뜻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주님 뜻대로 하기를 원하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자기 뜻대로 한다면, 그것이 자기가 한 선택이고, 그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인 “죄는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우리에게 타락한 죄 된 본성은 있지만, 아직 죄의 책임은 없습니다. 죄 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되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죄 된 본성 자체에 대하여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하고, 정죄를 받아서 영원한 멸망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짓기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올바른 죄의 정의입니다.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

창세기 2장 17절은 하나님께서 창조 받은 인간들에게 처음 주시는 말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왜 아담의 사형 집행이 즉각 시행되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대속의 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죄를 몸소 지시고 타락한 인류를 위하여 죄값을 지불하기를 자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 8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영어 성경의 번역을 보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the Lamb slain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KJV))”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창세 이후로 4000년이 지난 이후에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인간들이 범죄했을 때 그 죄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죽으실 구속의 계획을 창세 전부터 마련해 놓으신 것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바로 그 일을 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앞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나로 그 형벌을 받게 해주소서. 제가 사람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사람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로 예수님께서 중재자로 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려면 고통을 당해야 할 것을 아셨지만 인간을 대신하기로 하셨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은 그분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가지셨던 동일한 능력으로 범죄자에게 선고된 운명을 막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원죄설”은 성경의 구속의 계획과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창세로부터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지만, 많은 기독교인은 여전히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는 멸망당할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인의 죄를 대신하셨을 때는 완전히 갚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갚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절했을 때에 그들은 멸망당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이는 그들의 길에 주님의 십자가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기들은 지옥으로 미끄러지는 길 위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영원한 멸망으로 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선택으로 십자가를 짓밟고 지나가야 합니다.

죄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

요한복음 9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길을 걸어가시는데, 눈이 먼 소경을 발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에 제자들이 질문했습니다. 2절,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그들은 이 사람이 “죄인”입니까?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가정하고 그 죄가 누구의 죄 때문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소경이 죄인 된 것이 부모들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죄를 범했기 때문인지 알기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눈이 먼 사실과 죄를 혼동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눈이 먼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은 죄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소경 됨을 어떻게 취급하셨습니까? “내가 너의 눈을 용서한다”라고 하셨나요? 절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의 눈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죄 된 본성을 취급하십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는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인 죄 된 본성을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 된 본성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또한 믿는 자들에게는 죄 된 본성에 끌려다니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죄 된 본성과 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죄에 대한 두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가지는 죄로 기울어지는 본성인 죄 된 본성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죄 된 본성에 이끌려 각자가 범한 죄입니다. 죄 된 본성을 유전적으로 받은 것 때문에 우리가 정죄받는 죄인이 되어 죄의 책임을 지고 영원한 멸망을 당하도록 선고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두 가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실까요? 그분은 우리가 통회하는 심령으로 죄를 회개할 때 각자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죄를 대신 질 터이니 너희는 자유롭게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을 때 영원한 멸망이 없어지고 영원한 생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 된 본성은 언제 없어지는 것일까요? 우리의 육체 가운데 있는 죄 된 본성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없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홀연히 변화시키므로 본성을 재창조하시며 없애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 바리새인들은 우리와 같은 죄 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가 정말 모른다면, 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인 것을 알고도 범죄했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빛”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합니다. 곧,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오고 우리가 그것을 순종하기로 선택하지 않으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분명한 해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여기에 있는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알아야 죄가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올바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이 없는 어린 아기한테는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행 17:30). 우리가 모르고 있을 때는 죄로 여기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유혹과 죄의 차이

유혹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여기에 “자기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맞지 않는 것”으로 우리가 유혹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등 우리의 죄 된 본성을 자극하는 것이 유혹입니다.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원죄설을 믿는 자들은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유혹에 저항하지 않겠다고 결정을 할지라도 그런 자극에 끌리는 자체가 죄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죄 된 본성 자체가 죄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본성 자체가 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끌리는 것은 “유혹”이며 아직 죄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일까요? 죄는 유혹 뒤에 옵니다. 죄가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단계가 있습니다. 곧, 유혹을 계속 품어야 죄가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사람은 처음에 유혹을 받고, 그 욕심을 계속 품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 유혹을 품기로 선택해야 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에 대한 충동과 유혹이 있다 해도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대한 우리의 선택에 따라서 죄가 성립되는 여부가 결정됩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 단계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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