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35호 제4부 은혜의 해

제4부 은혜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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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은혜의 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1~2)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려고 할 때 “은혜의 해”는 킹제임스 성경에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는 해, 받으실만한 해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서 온 세상의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면서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메시아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받으시는 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전파하러 오신 것입니다.
메시아가 온 것은 우리를 이 세상에서 잘 살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힘센 자들에게서 보호하시기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의 원수를 벌하시기 위한 것도 아니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용서와 구원과 은혜를 전파하러 온 것이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가르치고 믿던 메시아의 사명에 대한 가르침과 너무 상이한 것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는데 초림, 재림, 삼림에 대한 예언이 다 있습니다. 그 예언들 중에 유대인들은 재림에 대한 예언을 초림으로 해석하여 가르치고 믿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인간적인 소원이었습니다.

메시아의 사명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시는 것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는 마음이 깨끗한 자가 받습니다. 자신의 생각, 편견, 지금까지 배워온 모든 교육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는 자들에게만 천국이 그들 마음 가운데 임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진정으로 진리를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 가운데 자기가 믿고 싶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진리가 그대로 전해질 때 싫어하고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배고프고 목마르지 않기 때문에 진리만을 얻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자기로 차 있으니까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상한 자”는 영어로 “broken hearted”입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겸손하고 마음에 통회하는 자와 함께하신다고 기록합니다. 통회하는 자는 자기가 범한 죄 때문에 슬퍼서 마음이 깨어진 자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악과 죄의 노예가 되어서 질질 끌려가는 자신이 미운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나님께 대해서, 이웃에 대해서, 자기 가족에 대해서 지은 죄에 대해 가슴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죄 자체에 대해 슬퍼하고 마음이 상해있는 자에게 주님께서 그들을 위로하고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것이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약 2000년 전에 메시아로 오셔서 그런 사역을 하셨으면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에도 똑같이 가난한 자와 상한 자에게 주님께서 오십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노예나 종들은 돈을 주고 풀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로된 자들은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포로는 전쟁하다가 적군에게 붙잡혀 간 사람들입니다.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려면 포로로 잡아간 적군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원수의 힘을 능가해야 포로된 자들을 풀어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그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입니다(마 1:21). 그러므로 복음은 죄의 용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전법칙을 통해 타고난 죄의 본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으로 다스리고 승리함으로 내 마음속에 평안과 즐거움을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 속에 있는 죄의 영향을 이길 수 있게 함으로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롬 1:16).

죄의 포로가 된 자들을 그 죄의 힘에서 놓아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처음에 예수님께 나와서 회개하고 믿을 때 얻는 칭의의 경험은 죄의 정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성화는 죄의 파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그것이 우리가 거듭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매일의 생애에서 우리가 죄의 힘에서 해방되는 경험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죄의 힘에서 해방되는 경험이 없는 것은 구원받은 증거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이 존 웨슬리의 가르침이었으며 성경이 기록하는 참된 복음입니다.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오신 예수님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죽음을 두려워해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죄에게 질질 끌려 다니며 종 노릇 하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의미이며 히브리서 2장이 설명하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설명하기를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나셔서 죄를 정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충동에 넘어져서 끌려다니면 그것을 죄라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또 밖에서 오는 죄의 유혹에 넘어져서 우리가 그 죄에 끌려다니면 그것은 우리 속에서 죄라고 정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죄 없는 생애를 사신 것은 우리의 육신 속에서 죄를 죄라고 정죄하셨다는 말 가운데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무서워서 죄의 종 노릇하고 끌려다닌 우리를 해방시켜 내서 건져 내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는 메시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일을 하시기 위해 오셨다고 예수께서 이사야 61장을 펴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교회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면으로 예수님께서 도전하신 것입니다. “신원의 날”은 읽지 않으시고 “은혜의 해”란 말씀을 하신 다음에 앉으시고 “오늘날 이 예언이 너희 눈 앞에서 성취되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가 오셔서 하려고 했던 그 사역을 그들이 받아들여서 진정으로 거듭나고 죄의 종에서 해방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과 로마서 8장에 있는 말씀은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무엇을 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고 왜 눈 먼 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셨을까요?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구제입니다. 병 낫고 구제받은 많은 사람이 구원은 받지 못했습니다. 병이 낫고 부활한 사람도 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병을 고치신 것은 상징이었습니다. 죄의 병으로 아파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영혼들을 건져내고 해방시켜서 죄 없는 생활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메시아와 그의 가르치심을 왜 믿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의 잘못된 신학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에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잘못된 신학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에 대부분의 교회들에서 잘못된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연약한 점이나, 외부에서 오는 어떤 유혹과 죄의 공격일지라도 우리가 승리할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복음입니다. 참된 복음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메시아의 사명이고 메시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자유하게 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은혜의 해를 전파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잘못된 신학 때문에 그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거절했던 것입니다.

신원의 날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그저 용서하는 일로 그친다면 세상에 그렇게 연약한 십자가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사명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영원히 사람을 마귀의 무서운 힘에서 죄의 종 된 상태에서 건져내서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거절한 자들은 “신원의 날”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히 9:28)신다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능력으로 죄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을 데리러 예수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죄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죄와 함께 멸망당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를 인도하시지만 마지막까지 죄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신원의 날을 경험하게 되는데 자기 죄 가운데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은 마지막 때까지 복음을 순종하지 않고 죄와 함께 내버려둘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처참하게 멸망당하는 신원의 날에 대한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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