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32호 제2부 자기기만

제2부 자기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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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

1) 첫 번째 부류 –
분명 성경의 가르침과 틀린 데, 잘못된 이론들을 확신에 차고 진지한 자세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어떤 교리나 성경에 대한 부분에서 한 번 “이것이다” 라고 믿으면 도무지 다른 것은 이해하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실하게 믿을지라도 그 진실성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두 번째 부류 –
또한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믿고 확신에 차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줄은 알지만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자기가 믿고 있는 그 진리대로 살고 있다고 기만당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진리를 확실하게 믿을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이 두 부류가 믿는 것은 다르지만 결국 자신에게 기만당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일합니다.

3) 세 번째 부류 –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먼저 자신의 입장에서 설명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 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 이야기를 먼저 듣느냐에 따라 한번 들은 편견이 잘 없어지지 않으니까요.
세 번째는 올바른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편견에 사로잡힌 부류입니다. 어떤 사실을 접하기 전에 그 사실에 대해 왜곡된 정보를 먼저 받아들였다면 그것이 편견이 되어 나의 시각과 사상은 비뚤어지게 되고 많은 것들을 오해하게 되지요. 편견을 깨뜨리지 않는 한 진리가 오류로 보여 배척하게 될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편견은 사탄이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렇듯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을 기만에 빠뜨린 후에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기만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기만은 자신만 기만당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기만시킬 수 있는 무서운 영적 질병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자신에 대해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으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지요! 그러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빠져있는 심각한 기만의 상태를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4) 기만의 시작
죄는 하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천사장이었던 루시퍼가 반역을 일으켜 영적인 전쟁이 일어났고 천사의 삼분의 일이 루시퍼를 따라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서 눈물로 호소하고 설득해도 결국은 반역이 진행되었습니다. 어떻게 피조물이, 창조주가 호소하고 설명하는데 믿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요? 어떻게 죄가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천사들이 하나님이 가서 설명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죄는 신비입니다. 사탄이 천사들에게 하나님을 고소하고 불신을 일으킬 때에 반복적으로 한 말이 사상에 영향을 끼쳐 너무나 진실되게 자신의 말을 믿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실성에 듣는 천사 삼분의 일이 다 그냥 믿어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습관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자기가 그 사실을 믿기로 결심하고 거기에 계속 의미를 부여하니까 정말 큰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2.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들

1) 그리스도를 거절한 유대 지도자들
비상소집한 산헤드린 회의에서 처음부터 모두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찬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의원들은 “예수를 죽이는 것이 정말 현명한 처사일까요?”라는 질문을 했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성전에서 학식 있는 율법박사들과 토론하던 장면을 회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나사로를 살리신 일들을 기억하며 “이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무리는 “아닙니다! 예수는 우리를 존경하지도 않고, 죄인들과 어울린 자입니다. 우리를 공공연히 책망하므로 우리의 명예를 손상시킨 자입니다.”라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갈등과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일어나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예수가 비록 무죄할지라도 민족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성가신 존재였죠. 지배자들의 권위가 약화되는 것보다 그가 죽는 편이 나았습니다. 지배자들이 백성의 신임을 잃게 되면 국가의 세력이 훼손될 것이고, 그러면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이며, 그 결과로 로마인들이 와서 성전을 훼파하고 민족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갈릴리 사람 하나가 죽어서 민족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죽음인가!”
산헤드린 회원들은 가야바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기만당했던지 이 결정에 대해 너무나 기뻐하고 로마로부터 민족을 구원한 자들처럼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자기기만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의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성령의 음성을 들었지만 무시하고 깊은 자기기만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게 된 것이지요. 자기가 뭔가 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하면 자기기만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됩니다.

2) 모세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던 고라, 다단, 아비람
자신들이 꾸미고 있던 반역을 반역적인 행위로 생각하고 진행한 것이 아니라 옳은 일로 믿고 확신하며 일을 진행했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넌지시 했던 말이 백성들에게 그토록 잘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백성들도 자신들과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으로 자신들이 움직이고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죽이고 자신들이 그 지도권을 차지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반란을 타당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이 항상 모세에게 역사하고 있음을 목격하고 함께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기만의 늪에 빠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계획한 유대 지도자들의 교묘한 정치적 술수로 자신을 포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족장들을 선동해서 반란에 앞장섰던 고라의 반역을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도 늘 깨어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그때의 상황에서 그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거나 아니면 비겁한 침묵을 지키는 자들의 무리 속에 서 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을 판 유다
유다는 군중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을 때에 제자들과 연합하였고 회당과 바닷가와 산 위에서 하신 그분의 말씀에 도취되었고 구주의 가르침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유다는 마을과 도시에서부터 예수님께 모여드는 병자와 절름발이와 소경들을 보았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구주의 큰 이적을 목격했습니다. 그는 몸소 그리스도의 능력의 증거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일찍이 그가 들은 어떤 사람의 가르침보다도 훨씬 훌륭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크신 선생님을 사랑하였으며 그분과 함께 있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구주께서도 유다를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전도사역을 하도록 위탁하셨으며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시키는 경지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의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비평하고 비난하는 성질을 길렀습니다. 유다는 제자들에게 몹시 존경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자질에 대해 스스로 높이 평가하고 그의 동료들의 판단력과 능력을 매우 열등하게 보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원칙과 방법이 그리스도의 그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이 일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더 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월절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는 반역자의 의도를 폭로하셨으나 친절하게도 제자들에 대한 그분의 봉사에 유다까지 포함시키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랑의 호소를 무시하고 예수님께서 씻기셨던 발이 그분을 팔기 위하여 나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 믿었고 그가 주님을 파는 것이 매우 지혜로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폭도들에게 순순히 체포되리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주께서 자신을 묶어 끌고 가도록 놔두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습니다. 매 순간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원수들 앞에 나타나 그들의 모든 음모와 권세를 무색케 하시어 그분의 원수들을 놀라게 하시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퍼붓는 모든 욕설을 묵묵히 참고 계시는 것을 보고 그의 주님을 팔아 죽음에 이르게 한 이 반역자는 말할 수 없는 무서운 공포심에 사로잡혔고 결국 그는 절망 중에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옳다고 생각했던 유다의 착각은 예수님을 파는 죄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게 만든 무서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4)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
사울이 그렇게 된 것은 잘못된 교육에 의해서 일수도 있고, 잘못된 정보들 때문일 수 있고, 자기가 신뢰하는 주변 사람들의 말 때문에 형성된 경우일 수도 있고, 자기가 속해 있는 교단에 대한 맹신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히면 자기가 옳다고 믿는 그 가치관을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데 앞장서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3. 자기기만의 과정

성경에는 자신을 스스로 기만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이 말씀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경고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또는 어떤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속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대면해서 그의 기적을 보고 가르침을 들었는데도 심각한 자기기만에 빠지고 말았으니까요~

1) 자기 변명
만일 우리가 어떤 잘못된 말이나 일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잘못된 말이나 행동을 한 후에 우리는 그것을 계속적으로 생각하고 기억하면서 ‘아,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렇게 말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음에는 그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말아야지’ 라는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되지요. 여기까지는 당연하고 바람직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그땐 내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기기만의 늪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기기만은 더욱 발전돼서 급기야는 마치 자신이 그러한 잘못된 말과 행동을 전혀 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올바른 말과 행동을 했던 것으로 스스로를 설득하게 됩니다. 우리의 실수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하고 낮아지는 것을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는 단지 후회를 하다가 자기기만 가운데로 빠져드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자기 연민
자기기만은 매우 작은 어떤 일에서 시작됩니다. 사탄은 단번에 누구를 죽이라고 충동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처음부터 유대 지도자들에게 즉시 그리스도를 죽이라고 속삭이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지요. 또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에게도 모세를 단번에 반대하도록 충동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사탄이 그러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접근했더라면 그들은 사탄의 충동을 알아차리고 거절하였을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자기기만의 늪으로 끌고 들어가기 위해서, 사소하고 조그만 일로부터 그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고라에게 있어서 자기기만은 자기 연민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고라는 모세의 사촌이고 레위 자손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직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질투와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공공연하게 반역행위를 하지 않고 은밀하게 한두 마디씩 불만과 문제를 제기하면서 모세를 반대했습니다. 서운함이 그를 병들게 만들어 버렸지요.
서운함이라는 마귀가 들어가면 정의가 보이지 않고 상식이 통하지 않으며 상처받은 감정이 자기를 기만하도록 그냥 내버려 둡니다.
자기 연민으로 시작된 감정은 결국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유대의 제사장들도 동일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듣지 못한 천사들의 노래를 무식하고 천한 목자들이 들었던 것에 대해서 몹시 싫어했습니다. 유대의 지도자들과 랍비들은 자신들이 무시당하고 모욕당하는 느낌을 느꼈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흔히 그 과정은 점차적이요 거의 알아챌 수 없다. 빛은 하나님의 말씀과 당신의 종을 통하여 혹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통하여 사람에게 임한다. 그러나 한 줄기의 빛이라도 무시할 때에 영적 감각력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어서 두 번째에 나타나는 빛은 그만큼 분명하게 식별할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암흑은 증가되고 마침내 영혼이 밤과 같이 어두워진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였으나 진리를 대적하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를 사탄에게 돌렸다. 이렇게 행함으로 그들은 고의로 기만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사탄에게 굴복하였으며 그 때 이후로 그의 능력에 지배당했다”(오 그리스도 33장 내 형제는 누구인가? ).

점차적이고 알아차릴 수가 없게 자신을 기만하기 때문에 처음엔 인식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양심에 빛을 비춰 주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상처받은 감정이 더 크기 때문에 무시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또 빛을 주시고 호소하시는 데 한 번 거절했기 때문에 두 번째는 더 쉽게 거절하게 되지요. 그러다가 영혼이 캄캄한 밤처럼 어두워져서 성령의 역사를 사탄에게 돌리며 진리를 대적하고 고의로 기만을 선택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성령께 굴복하지 않으면 “고의로 기만을 선택하게..” 될 정도로 인간이란 존재는 나약합니다.
처음에는 작은 한 가지 유혹이나 불신이 있었는데 그것이 자극받고 충동을 받을 때, 그 유혹의 힘은 점점 커져서 결국에는 마음이 완전히 사탄의 지배를 받기까지 되는 것입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은 출애굽한 결과로서 생긴 그 고생스런 경험들에 대해서 애굽에서 그런대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광야로 들어와 어려움을 겪으며 가나안에 쉽게 입성하지 못한 이유를 모세가 제대로 인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여러 번 제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무시하고 모세에게 여러 가지를 제안했지만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더 큰 서운함을 느끼며 모든 것을 모세 탓으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설득하는 지점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자기기만의 늪의 중심을 향하여 믿음을 가지고 행진했습니다.

모세가 애굽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같이 하기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고, 출애굽 여정 가운데 모세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기적을 함께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라의 반역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과거에 있었던 사실조차도 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헌신을 생각하는 대신에 자신들의 불만족과 불편함을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세의 모든 봉사들이 전혀 무가치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변조 작업
작은 시험과 유혹이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면, 지금까지 있었던 사실에 대한 변조 작업이 시작됩니다. 자신이 행한 잘못된 행위에 대하여 ‘누구라도 그땐 나처럼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라고 합리성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지요. 처음엔 자기 변명을 하다가 점점 그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믿게 됩니다. 과거의 기억이 달라져 버리는 변조 작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또는 어떤 일에 대해 그 사람의 동기를 오해하고 의심하다 보면 왜곡된 모든 것이 실제처럼 보이게 되면서 거짓을 사실로 믿게 되며 자기기만의 길로 빠져들게 됩니다.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을 믿는 자기기만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게 될 때, 병적인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기만당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거짓을 말하게 되고, 자신의 생각이 옳고 타당하고 합리적임을 확신하면서 잘못된 일을 도모하게 되지요.
자신의 수치스런 기억을 변조시키고 조금씩 미화하면서, 자신의 배도에 대해서 타당하고 합리적이었다고 자신을 설득하면서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됩니다.
따라서 과거에 있었던 사실들도 부정하게 되고, 상대방을 죄인으로 만들기도 하면서 자신은 역시나 옳았다는 기만에 거하게 되는 것이지요.

4) 돌이킬 기회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유대인과 모세를 대항하여 모반했던 백성들과 유다는 돌이킬 수 있었던 충분한 기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을 볼 수 있었고, 그 당시의 상황을 분별할 수 있는 충분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우리를 기만에 빠져들게 버려두지 않습니다.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사 30:21). 올바른 선택과 판단을 위해 빛을 계속 비춰 주시고 인도하십니다.
하지만 의심을 계속적으로 마음에 품음으로써 자기연민에 몰입되고, 자신을 스스로 설득함으로써 자신이 의롭다는 생각에 빠져들 때 기만은 절정에 달해 형제들에게 악한 영향을 전파하는 위험한 상황을 불러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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