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31호 과거를 지우고 미래를 향하여-손계문 목사 칼럼

과거를 지우고 미래를 향하여-손계문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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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이상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본 모습, 믿는 자들이 가장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자기 자신과 죄에 대하여 종이 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상태를 개선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막상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는 않습니다.

막연하게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면서 간혹 회개라는 것을 하지만, 그 죄를 낱낱이 구별하여 버리지는 않습니다. 죄에서 구원해 달라고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으로 회복되지 않은 채 구원받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악을 행할 때마다 이기심은 점점 강하게 되고 양심은 더욱 강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사탄의 형상을 닮게 됩니다. 사탄의 모습을 한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 갈 수 있겠습니까?

“선하게 살고 싶다. 의롭게 살고 싶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다.”는 소원은 좋지만 그것으로만 그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실제로 의롭게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섬기기로 선택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희망만 하다가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은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놓기 위한 좌우명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이상(理想)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받는 삶이 아닙니다. 만사형통인 삶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이상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높은 경지의 어떤 종교적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불의를 합리화시켜주지는 못합니다. 죄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강렬한 신비적 체험, 감정적 충족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찬양집회 때 뜨거운 눈물을 쏟아낸 것이 거듭난 증거가 아닙니다.

참된 기독교인,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모든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거룩한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을 진실로 원하는 사람입니다.

명목상의 신앙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이 다만 명목상의 신앙에 불과했고 하나님께서 들으실 만한 신앙의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법궤 속에 간직한 율법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명을 멸시하고 그 요구를 경시하여, 그들 중에 계시는 여호와의 성령을 슬프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거룩한 계명을 순종할 때에 여호와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고 당신의 무한하신 능력으로 그들을 위하여 일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법궤를 하나님과 관련시키지도 않고, 당신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당신께서 나타내신 뜻을 존중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그것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에는, 그 법궤가 그들에게 보통 궤짝보다 더 유용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민족들이 자기들의 신들을 바라보듯이 마치 법궤 자체가 능력과 구원을 가진 것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법궤에 넣어 둔 율법을 범하였습니다. 법궤를 숭배하는 그 일이 그들을 형식주의와 위선과 우상숭배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켰고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죄악을 버리기까지는 그들에게 승리를 주실 수 없으셨습니다.

법궤와 성소가 이스라엘 중에 있는 것으로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희생의 제물을 드리고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것으로는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심중에 죄악을 품은 자의 요구를 들으시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회 성경을 사랑한다 말하고, 성경을 품에 안고 다니는데 막상 성경 말씀에 대한 순종은 없습니다. 참 아이러니 합니다.

우리는 하늘에 갈 백성들입니다. 지나온 생애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고 하늘에 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14개의 “견”으로 본 일생의 노래
오랫동안 교회에서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고
그것을 위해 충성했습니다.
편견(偏見)으로 내가 배운 것 외에는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고정화된 사고틀 안에 갇혀버렸습니다.
선입견(先入見) 때문에 알아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것만이 전부인양 교만이라는 꼴불견(꼴不見)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나는 방황하는 유기견(遺棄犬)이 되어
점점 하나님을 떠나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맹견(猛犬)과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맹견(盲見)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꼴불견이 되고 유기견이 된 나는
두 맹견이 되어 끝없는 나락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을까
주님은 나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어느 날 내게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 왔습니다.
직접 듣고, 직접 보고, 직접 만져보면서
나를 이루고 있던 “견”들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일가견(一家見)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이견(異見)이 생겼지만,
그것은 또 다른 발견(發遣)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와 같이 어둠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파견(派遣)하셨습니다.
그 길이 비록 인견(人絹, 비단길)은 아닐지라도
충견(忠犬)이 되어
오늘도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이 길의 끝에 우리 주님을 접견(接見)하리라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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