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29호 제2부 글자로만 아닌 영으로

제2부 글자로만 아닌 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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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

바울은 새 언약을 옛 언약과 대조하면서 새 언약은 영으로, 옛 언약은 의문으로 언급합니다. 옛 언약 아래에서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집착은 우상숭배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영을 무시하고, 의문(글자)의 지배 아래 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이고 외양을 중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헌신과 순종은 기계적인 방법이나 복잡한 규칙 및 요구사항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그 특징을 이루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신조와 이론적인 신학에는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기록된 율법인 “의문”(글자)은 모세가 만든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에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기록인 “의문”이 유대인의 마음에 율법의 “영”을 세워주는 좀 더 높은 목표에 이르는 유일한 도구가 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은 율법의 “의문”을 율법의 “영”으로, 즉 메시아가 제공할 구속을 믿음으로 개인적으로 죄에서 구원받는 살아있는 종교 경험으로 전환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것만으로는 “죽이는 것”입니다. 율법의 “영”만이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을 살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수행은 “경건의 능력”없이 “경건의 모양”(딤후 3:5)으로 변질되기 쉽기에 기독교 신앙의 “의문”은 구원을 위해 그것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결국 죽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바울이 여기서 구약과 십계명을 경시하고 폐지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쓰는 편지에서 바울은 구약과 십계명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이 있다고 거듭 확증합니다(롬 8:1-4; 딤후 3:15-17; 마 5:17-19).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는 구약 외에는 다른 “성경” 자체가 없었습니다. 히 11장에 기록된 기라성 같은 신실한 사람들과 구약 시대의 수많은 신자들은 신약시대의 신자들처럼 그들의 삶 속에서 성령의 소생시키는 사역을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문”도 함께 있습니다. 성령의 소생시키는 능력 없이는 어느 교회에서든 복음은 반드시 죽은 글자가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문”에 만족하면서 영적 생명 없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옳은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도덕적 및 영적으로 올바른 상태를 보존한 결과와 증거로 나타나는 옳은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와 예배를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문제로 삼기보다 규칙 제도에 대한 순응으로 축소하는 것은 “의문”의 봉사와 직분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건 그리스도인이건 종교상의 형식과 의식은 단순히 목적을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즉각 참된 종교경험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인 십계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형식적으로 그 교훈에 복종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자연스런 결과로 순종하게 될 때에만 그 순종은 하나님의 눈에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마 19:16-30). 율법의 “영”은 율법의 “의문”을 폐하지 않고 도리어 세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순종의 “영” 없이 율법의 “의문”에 순종하면 그분의 의의 표준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원리를 강조하셨습니다. 율법의 “영”은 율법의 “의문”을 폐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섯째 계명에 기초하여 형제에게 “노하”지 말라고 명하셨지만(마 5:22), 그렇다고 형제의 생명을 취하여 계명의 문자를 어겨도 된다고 허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섯째 계명의 “영”은 분명히 그 “의문”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의문”을 보완하고 “크게” 하는 것입니다. 넷째 계명을 포함한 십계명의 각 교훈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문”이 선한 것이지만 죄인을 죽음의 선고에서 구원해 낼 능력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의문은 죄인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율법은 본래 하나님이 주실 때 생명을 증진하기 위해 고안됐으므로(롬 7:10,11)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롬 7:12)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은 순종과 어울리며 사망은 불순종과 어울립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인을 죽음에 처하게 하는데, 이는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겔 18:4, 20).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나 복음은 죄인을 용서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 고안됐습니다(8:1~3).

율법은 계명을 범한 자에게 사형을 선고하지만 복음은 그를 구속하여 다시 살립니다(시 51편).

“영”의 직분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눠 주는 것입니다. 율법이 부과한 사형 선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선물(요일 5:11, 12)로 인해 파기됩니다. 하나님의 의의 표준이 회심한 사람의 양심에 이르면 순종과 생명의 기회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양심에 이르면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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