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25호 제3부 용서라는 은혜

제3부 용서라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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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는 것을 어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받으면 재창조되고 죄에서 완전히 떠난다는데 넘어졌으니 나는 용서받은 자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으로 본인을 괴롭히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생각하기 전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먼저 생각하십시오. 항상 승리해야 하고 항상 이겨야만 한다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용서받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진정으로 경험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승리자의 삶을 살겠습니까? 용서받지 못하니 늘 죄책감에 시달리고 신앙에 기쁨이 없습니다.

혹시 공중그네 타는 서커스 공연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떨어져도 받쳐줄 그물이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재빨리 복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끄러져 떨어진다 해도 우리 밑에는 그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모든 실패에 대한 용서를 제공하셨습니다. 하지만 만약 떨어졌을 때 그물 위에서 잠을 잔다면, 우리는 서커스단에 남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거룩함 속에서 생활하기 원한다면, 공중그네 위에 있기를 원한다면, 우리 밑에 그물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곡예사들은 그물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물이 없다면 그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우리는 긴장하고 두려워할 때 더욱 떨어지기 쉽습니다. 떨어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더할 나위 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그렇게 할수록 그렇게 사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 곧 하나님과의 화목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죄 많은 인간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근거를 둔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늘 불안하며 쉼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톨스토이

톨스토이는 산상수훈을 문자 그대로 따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그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따르라는 말씀을 읽고 톨스토이는 하인들을 놓아주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포기했으며, 가지고 있던 광대한 토지를 처분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당시 농부들이 입는 옷을 입고 다녔으며, 손수 만든 신발을 신고 밭에 나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마지막 장편소설인 부활의 수익금 전부를 러시아 황제로부터 박해받던 종교단체에 주었습니다. 산상수훈으로부터 나온 톨스토이의 비폭력 철학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같은 비폭력을 주장하는 후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참 훌륭합니다. 그런데 완전하게 살고자 그렇게 애써 노력했지만 마음의 평화는 얻지 못했습니다. 죽을 때 임박해서 쓴 그의 일기와 편지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비관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신앙대로 살고자 했을 때,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는 그를 악령처럼 괴롭혔습니다. 톨스토이는 자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톨스토이는 결코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고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우리가 온전함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나약함을 우리가 알고 있는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얼마나 온전한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그 온전함으로부터 얼마만큼 비켜 서 있는지 뿐이다.”

언뜻 보면 맞는 말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말은 “어? 당신은 그리스도로부터 100m 떨어져 있어, 당신은 50m 좀 낫군. 뭐야 당신은 1km나 떨어져있잖아. 저기 가서 더 수행해” 그런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보면 볼수록 더 부족하게 되고 자신감을 상실하고 결국 포기에 이릅니다. 아니면 반대로 “내가 어떻게 예수처럼 돼?” 화를 내고 뛰쳐나가 버리게 되죠.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지 못하며 자신의 어떠함만을 바라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렇습니다. 톨스토이는 자살하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할까 봐 집에 있는 끈이란 끈은 모두 숨겨야 했고, 갖고 있던 총들을 치워버려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톨스토이는 가족도, 재산도, 자신의 정체성도 모두 잃어버린 채 방랑 생활을 하다가 어느 시골 철길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한 그의 노력은 이러한 결말로 끝나고 말았습니다.톨스토이는 예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계명을 바라보았고,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이를까를 강조하며 살았습니다. 톨스토이는 하나님께 용납받는 경험없이, 하나님께 용서받는 경험없이 높은 표준을 향해서만 달려갔습니다. 실수하게 되면, 더욱 자신을 매질하면서 정결해지기 위해 애썼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톨스토이는 “높은 표준”이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주셨지 우리가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톨스토이는 자기가 율법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제2, 제3의 톨스토이는 계시지 않습니까?

거룩함 가운데서 살려고 발버둥 치며 싸우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 때문에 거룩함 가운데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거룩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사랑과 용서라는 그물을 허락하셨습니다.

자신을 용서하라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 아마 우리는 형제란 말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 자신이 바로 여러분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형제나 자매라면 자신에게도 그것을 적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가장 어려운 대적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면 그도 용서받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 아닙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원망,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상처를 입게 하는 만큼 우리 스스로에게도 상처를 입히는 일입니다.

지금 죄를 지어도 된다는 얘기를 하는 건가요? 아닙니다.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용서받을 수 있어도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죄책감에 짓눌리지 말고 하나님의 용서를 감히 주장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없는 분께서 우리와 입장을 바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져가신 짐을 왜 내가 계속 지려고 하는가 말입니다. 그러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 나아갑시다. 주님께 나가면 중풍병자에게 했던 말씀을 하실 것입니다. 어떤 말씀인가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거듭남과 성화를 가르쳐야 하고, 값비싼 은혜를 전하는 사람들이며, 죄를 죄라고 단호하게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모든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을 정죄하고 절망케하기 위함인가요? 아닙니다.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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