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23호 더불어 함께 손계문 목사 칼럼

더불어 함께 손계문 목사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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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모녀 사건이 아직 기억에 남 아있는데, 또 다시 두 모녀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2014년에 발생한 세 모녀 사건은 사전에도 등록이 되고, 세 모녀 법이 등장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송파구에 사는 세 모녀가 큰딸의 만성 질환과 어머니의 실직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방세 50만원과 가스비 12만 9천원, 전기세, 수도세 등을 어림잡은 돈 70만원을 봉투에 넣고 겉면엔 “주인아주머니께..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적어놓고 번개탄을 피워 자살한 사건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적었을까? 두 딸과 마지막 대화를 어떻게 나눴을까? “얘들아 이젠 월세 걱정 안해도 된단다.” 그 마음이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쓰던 가계부를 보면 만원 이 넘는 건 자살하기 이틀 전에 시켜 먹었던 족발 19,000원 짜리가 전부…. 세 모녀의 공과금 중에는 건강보험료 5만원도 있었습니다. 가계부는 식구들끼리 과일 한번 사 먹기 어려웠을 정도로 살림이 빡빡했음을 짐작케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5만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을 겁니다. 지하 셋방에서 살던 세 모녀는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은 물론 수입도 없는 상태였으나, 대상이 되지 않는 다는 이유로 국가와 자치단체가 구축한 어떤 사회보장체계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의 파장으로 소위 “세 모녀 법”으로 불리는 [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됐으나, 아이러니한 것은 세 모녀가 살아있어서 그 개정안을 적용해도 당사자인 세 모녀는 이 제도의 수급자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 일까요?

그런데 2017년 8월, 보증금 없이 월세 50만원에 지내며 생활고로 고민하던 딸과 어머니가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어린이집에서 근무했던 어머니가 피부질환으로 일하지 못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 왔지만 모녀는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초생활 수급자는 아니었습니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어떤 이유로 수급자로 지정되지 못했다지요. 남편과 7년째 별거 중이지만 이혼한 상태는 아니어서 수급자로 지정되지 못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였답니다. 광주의 한 대학교 1학년인 딸은 2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친척에게 “등록금을 낼 수 있게 500만원을 빌려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친척 역시 경제적으로 형편이 넉넉지 않아 빌려 주지 못했고, 모녀가 사망한 25일은 대학교 등록금 납부 기간 마지막 날이었다고 합니다. 대학등록금이 한 학기에 500만원. 서민들이 어떻게 대학을 다닐 수 있겠습니까?

한 대학생의 사정은 참으로 딱했습니다. 이 학생은 몸이 불편한 동생, 홀어머니 이렇게 세 식구가 월세 29만원짜리 영구임대주택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5월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간신히 이겨낸 뒤, 동생과 함께 어떻게든 앞길을 헤쳐나가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습니다. 백방으로 뛰어다녀 구청의 긴급생활자금 지원도 받게 됐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건강보험료가 7만원이 나와 매우 당황했다고 합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실질적인 가장이 된 자신 앞으로 임대주택의 명의를 전환했는데, 월세 29만 원짜리 임대주택의 보증금과 월세에 건강보험료가 부과됐다는 겁니다. 등록금은 고사하고 당장 생활비 마련이 급한 대학생 가장에게 말입니다.

우리 이웃들은 급식 못먹고, 생리대 못 사서 양호실에 들락날락하며 친구 거 빌려 쓰고, 난방비 아끼기 위해서 보일러 못 틀고, 수면 양말신고, 창문에 뽁뽁이 붙여가며 삽니다. 그게 대부분 우리의 삶이지요. 당장 몇 천원이 없어서 죽음을 선택한 이들. 자살률 세계 1위. 이 죽음들이 그냥 자살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명백한 범인이 있습니다. 국민세금을 사리사욕에 탐하는 정치가들요? 그럴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웃을 돌보지 않은 교회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습니까? 떳떳한가요?
부모형제도 못살면 외면하는 이 세상인데 남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정말 가난이 죄인 오늘날은 자본주의 우상 시대입니다. 너, 나, 우리 모두가 맘몬을 숭배합니다. 재산 은닉하면서 서류 상 이혼하고 영세민 등록해서 지원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작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받지 못하는 이상한 사회제도 안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지시스템이 문제가 많고, 정책을 개선해야 하고, 민생을 돌봐야 하고 뭐 그런 거창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피켓을 들고 광화문 광장에 나가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 입니다.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실천의 문제입니다. 대한민국 기독교인 수가 약 1,000만명! 5명 중 1명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이 할 얘기가, 고작 “자살은 죄”라거나 “저 사람들 하나님 제대로 믿었으면 저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하고 말아야 할까요? 기독교인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를 순종하고 산다면 우리 주변에 아픔은 줄어들고, 더불어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가 실현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다 돌봐 줄 수는 없을지라도, 내 주변에 있는 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셨습니다. 2천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만 있습니까? 아니면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나라의 원칙을 이웃에게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을 때, 이분이야말로 유일한 참 스승이심을 실감했고, 그분의 말씀이 들리는 곳마다 왜 모든 이에게 존경과 예배의 대상이 되는지 이해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섬기는 마음 가득하길 소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이었을 때, 우리에게 베푸신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사의 마 음을 드러내는 것은 이웃을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배고픈 모든 사람의 굶주림을 다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가난한 자, 병든 자, 고아와 과부, 외롭고 낙심한 자의 어려움은 채워줄 수 있습니다. 내게 가진 것이 없어서 채워주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질이 아니더라도 따뜻한 말, 보드라운 돌봄,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들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핑계치 말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지금 가서 이렇게 행하도록 합시다. 연말연시가 되었습니다. 이럴 때만 꼭 생색내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럴 때만이라도 이웃의 필요를 한번 더 돌보면 어떨까요?

“[15]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2: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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