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23호 제3부:겟세마네

제3부:겟세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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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님의 생애 중 특히 마지막 장면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곧 그와 비슷한 경험들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양을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하신 경험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겟세마네로 따라가 봅시다. 따라갈 준비가 되었습니까?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8,39).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잠자는 제자들은 재림이 가까운 이 마지막 때에 잠자는 교회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깨어 기도하는 무리를 대표합니다. 시계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칠 때에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5,46)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 닥칠지 아셨고 그 일을 위하여 깨어 기도하며 준비를 하셨습니다. 시험이 올 때 준비 완료! 이것이 우리의 경험이 될 수 있고, 우리의 경험이 되어야만 합니다.

다른 한편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변을 당했습니다. 차이점은 한 부류는 자고 있었고 한 사람은 깨어 기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은 예언을 믿고 순서대로 행동에 옮겼고, 다른 한 무리는 자신들의 계획을 세우고 어떤 돌발적인 사건이 터진다 해도 모든 준비가 돼 있다고 자만했습니다. 우리 모두 이 두 무리 중에 한 무리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지금도 잠들어 있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필요하다면 다른 무리에 속할 기회가 아직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린 지금 겟세마네에 와 있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짜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 동산에는 감람나무가 있었고 기름틀 역시 그 동산에 있었습니다. 수 세기를 통해 감람나무 열매를 모아 그 기름틀에 넣고 눌러서 기름을 짰을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토록 무서운 압력에 눌리시며 사랑의 향유를 흘려 내시는 겟세마네의 경험을 가지셨습니다.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 언제, 왜 가셨습니까? “때가 이른 줄을 아시고”(요 13:1)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의 시간표를 따라 행하셨습니다. 정한 시간에 정한 일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할 때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올라가지”(요 7:8)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또 한 번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려고 할 때 제자들은 가지 않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시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희생제물이 바쳐지는 곳을 향하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 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을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오, 여러분! 여러분이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지식 가운데 하나는 옛날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아는 것이요, 그 하나님이 특별히 마지막 때에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인도하고 계신지 아는 것입니다. 예언의 성취를 위해 예수님께서 그의 시간과 장소를 아셨던 것이 중요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시간을 예언적인 면에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당신의 시간을 알았습니까? 때가 차매! 어느 때가 찬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날 밤이 자신을 위하여 준비된 정한 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을까요? 예수님은 다니엘서 8장 9장의 예언을 연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그냥 모든 걸 아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언을 연구하셔서 깨우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그렇게 자기의 때를 아셨습니다. 거기에 2300주야의 시작인 70이레가 나옵니다. 69이레가(483년) 지나고 마지막 한 이레가 시작될 때 A.D. 27년에 예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공중봉사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이레의 절반에, 즉 7년의 중간에 메시아가 끊어진다고 돼 있습니다. A.D. 31년이 되었을 때, 3년 반의 마지막 때가 온 것입니다. 아빕월 14일. 유대력 1월 14일에, 지난 14세기 이상 동안 수많은 어린양이 죽임을 당한 것처럼, 죽임을 당해야 할 것을 아셨습니다. 이렇게 분명한 것을 세대주의 예언에서는 먼 미래로 적용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각종 허황된 종말 시나리오가 난무하도록 문을 열었습니다.예수님은 자기의 때가 온 것을 아시고 겟세마네로 가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인성을 취하신 인간으로서 우리가 하는 것처럼 성경연구를 통해서 지혜와 지식을 얻으셨고 성령의 깨우치심으로 예언을 이해하셨습니다.

운명의 시간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알고 있습니까? 짐승의 표를 받게 할 시간이 박두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환난은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임합니다. 의인은 휴거되어 환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폭도들이 임하기 전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셨던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기도의 경험에 이르지 못하면 아무런 부흥도 개혁도 일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의사였는데 다른 제자들이 기록하지 않은 것들을 상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승리하는 사람들은 저들의 생애에서 분명히 이와 같은 고민에 찬 기도의 경험을 가져야 합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 밤에 제자들이 넘어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깨어서 기도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약점을 인식하지 못했고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마귀에게 자신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기도를끝마치셨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요 18:4-6).

땅에 엎드러졌다가 영광의 광채가 사라지자 유다는 일어섰습니다. 악한 자들의 돌같이 굳은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룩한 능력이 분명히 나타났는데도 그들은 계획을 실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으로 떨면서 “친구여,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셨지만, 유다는 아무런 마음의 움직임 없이 예수님을 끌어 안았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장면을 위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박해가 시작될때 유다처럼 친구와 형제들을 배반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 가지신 경험을 하지 않으면, 유다가 가진 경험을 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된 이유는 단돈 은 30냥이 탐나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인정을 받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다의 제안들을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쳐 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이 부분은 내가 목수 예수보다 더 잘 아는데…’

마지막 때도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넘겨주기보다는 극단, 광신에 빠져 잘못된 신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내어줄 것입니다. “내 남편이 잘못된 신앙에 미쳤어요. 내 자식이 내 부모가 내 아내가 사이비에 빠졌어요” 라는 명분하에 우리를 넘겨 줄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고통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장면들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위기가 발발한 처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빼 들고 방어할 모든 준비를 갖춘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홀로 계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일에 대해 겟세마네로 가시는 길에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요 16:32). 예수님께서 홀로 서셨던 것처럼 우리도 홀로 서야 될 것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줄 수 없고, 아무도 우리를 대신해서 위기를 견디어 줄 수 없습니다. 각자의 굳건한 믿음과 각자의 의로운 품성으로 홀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옳은 일을 위해 홀로 설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는지요? 우리의 자녀들에게 올바른 원칙들을 항상 제시해 줌으로써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라는 명령이 주어질 때, 하나님의 말씀이 무효가 되는 바로 그때, 그들이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는지요? 나이가 들면 신앙이 성숙하고 저절로 안정된 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셉이 17세 되었을 때 커다란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을 위해 굳게섰습니다.

다니엘은 18세에 바벨론에 잡혀가 유혹과 편리 가운데 살았지만 하나님의 증인으로 굳게 서기로 뜻을 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메시아로서의 일을 해야 한다고 동기를 밝히시던 때는 12세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모로써, 교사로써 우리의 자녀들을 어떤 사건을 위해 준비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생애 최상의 지침이 되도록 가르쳤습니까?

한국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슬픈 경험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념전쟁은 더욱 쓰라렸습니다. 열살 정도 되는 아이들이 흥분한 어조로 자신들의 부모를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증언한 기록들을 보게 됩니다. 사탄의 정신이 어린이들의 마음을 주장하게 되면 저들의 부모를 대항해서 증언하며 부모의 피를 요구하는데 마치 폭도들이 예수님의 피를 흘리기 위해서 아우성치듯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정말 상상할수도 없는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우리의 자녀들은 자신들의 길을 선택해야 될 때가 올 것입니다. 부모들이 사랑과 원칙에 잘 융화된 모본을 보여 주지 않는 한, 저들이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의 말에 순종하기를 가르치지 않는 한, 두려운 얘기지만 대부분의 우리 자녀들은 짐승을 섬기는 길로 나가게 될 것이며 부모를 고발하는데 앞장 설 것입니다.

고난

제자에게 팔리신 후 그 다음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예수님은 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꼭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가 아니어도 예수님께서 죽으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의 중압감 때문에 거의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그렇게 죽으실 수도 있었고, 잡히신 직후 사형장에 끌려가 쉽게 죽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지체되고 고난을 당하신 데는 특별한 이유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갈보리까지 가시는 동안 일곱 번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안나스 앞에서, 가야바, 산헤드린 회의에서 한번은 밤중에 한 번은 다음 날 아침에, 그리고 빌라도 앞에서, 헤롯, 다시 빌라도 앞에서 심문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마다 무리들에게서 모욕과 질시를 받으시고 고문과 시련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상처 난 곳에 또 상처나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경험해 보았습니까? 세 번 채찍에 맞으셨는데 채찍 맞은 상처에 또 다른 채찍이 그리고 또 다른 채찍으로 맞으셨기 때문에 그의 등은 찢어져 뼈까지 드러나는 깊은 상처로 찢기셨습니다. 로마 군병이 가시관을 만들어 왕관 대신 씌우고 조롱했습니다. 난폭한 폭도들이 조롱하며 침 뱉으며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능욕과 모독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셨지만 용서와 사랑의 품성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창조하시고 또 그들을 위하여 무한한 희생을 치르려고 하는 자들의 손에서 온갖 모욕을 당하셨으나 그것을 견디시는 것이 그분의 사명의 일부였기 때문에 거룩한 인내와 믿음을 발휘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난 폭도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이 모욕과, 갖가지의 방법으로 고난을 받도록 허락하실까?’ 그것은 사탄이 예수님께 하도록 용납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본을 끼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나타나기를 바라며 저들의 원수의 죄를 용서해 주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십니다.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내가 참을 수 있는데 까지 참았는데 이제는 도저히 못 참겠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예! 우리는 이런 표현을 자주 들어왔습니다. 어쩌면 그런 말을 우리 자신이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린 양을 따르는 무리에 대해서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계14:12). 다른 번역에는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견딜 수 있는 기회가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준비가 되었다면 우리도 그분처럼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요 18:11) 않겠느냐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하려고 하지도 않으셨고, 성내지도 실망하지도 또한 겁내지도 않으셨습니다. 누가 나에 대해 어떤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각종 오해와 비난의 말을 듣는 것보다 차라리 면전에서 한 대 얻어 맞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인간도 경험하지 못한 온갖 쓰디쓴 질고와 간고를 다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 성난 폭도들의 난동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거짓 증언하는 것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모순된 증언들을 참을성 있게 들으셨고 자기방어를 위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야유하고 조소하는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 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이 진리를 거절하는 기독교회 목회자들로부터 각종 모욕과 비난, 조소, 항의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한때는 길길이 날뛰면서 끊임없는 욕설과 죽이겠다는 협박전화를 이틀 동안 시달리며 받아야 했습니다. 가족의 신상까지 다 파악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협박을 하는데 심장이 멎는 듯했지만 마음의 평안이 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이 불쌍한 영혼을 어떻게 구원할까 하는 생각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정말로 주님을 위해 순교할 그때가 곧 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나의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클까요!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환경에서건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바랄뿐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생활에서 작은 고난들을 통해 인내하는 것을 배울 수 있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렘12:5). 매일의 삶에서 만나는 사소한 시험들을 이기도록 하시는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련시켜 말과 달려야 할 때 달릴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공회와 재판정에 불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참되게 경배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 신앙의 이유에 대하여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증언을 듣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바로 이것이 진리구나’ 하고 일어나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주님의 모본을 실증할 때에 실제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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