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23호 제2부:예수님의 생애

제2부:예수님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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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경험이 우리의 미래의 사건들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자 이제 예수님의 생애로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은 개혁자이셨습니다.

고고학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제사장들의 집은 예루살렘성전 가까이에 있었는데 초호화판 가옥들로 꾸며진 것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개인 집에 정결의식 목욕탕이 5개가 있고, 성전으로 통하는 전용도로가 있었습니다. 평민들은 그 도로 밑으로 다녔습니다. 이러한 유대 관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위선자들아! 겉은 아름답게 꾸미지만 속은 해골과 온갖 썩은 것과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들아!” 직설적이고 단호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참 통쾌한 일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목숨을 내놓고 하신 일입니다.

종교 질서에 도전하신 예수님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랑이 충만한 여러 행적들, 특별히 병자를 고치는 이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마냥 아름다운이야기가 아닙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병자를 치료하는 행위는 제사장들과 정면 충돌하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 병자들은 육체의 고통 때문에도 괴로운데, 하나님의 심판으로 병을 앓게 됐다는 선고까지 들었습니다. 병자를부정하다 선언하고 내쫓는 일은 제사장들이 하는 일인데 그렇게 부정하다고 낙인 찍힌 병자들을 가까이 하고 사회로 환원시키는 일을 허락도 없이 예수님께서 직접 하셨으니 당시 기득권을 무시하고 종교질서에 도전하는 행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제도에 도전하신 예수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쓰러진 행인이 있었지만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지요. 이 비유의 교훈이 우리가 어렸을 때 여름 성경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사마리아인처럼 선하게 남을 도와주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렸을 때 듣는 이야기죠. 예수님은 사회질서에 정면도전 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수가 우물 곁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하고 있는것을 본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습니까(요 4장).

유대인 남자가 매일 하는 3가지 감사기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것, 두 번째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신 것, 세 번째는 종으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 심지어 여자와 말씀하고 계셨으니 제자들이 의아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했지요. 그런데 하물며 외식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마리아인이 낫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몹시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유대제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습니다.

기득권을 허무는 예수님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까? 그 당시 성전은 탐욕에 눈먼 제사장들과 상인들이 뒤엉킨 부패의 온상이었습니다.정치와 종교가 결탁했을 때 그 종교는 부패하는 것입니다. 성전 밖의 돈은 부정하다며 프리미엄을 받고 돈을 바꿔주는 환전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상과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셨습니다. 정경유착의 끈을 처단하셨습니다. 참 멋지고 용감한 행동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시 상황으로 보면 청와대 앞에서 국기를 태운 것과 같은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이 일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더욱 고심하게 됩니다.

신분제도를 타파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사회적 멸시를 받는 죄인 중의 죄인인 매춘부, 매국노와 같은 세리와 한 상에서 지내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제사장뿐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도 경악할 만한 일이었지요. 예수님은 멸시하고 멀리해야 할 사람들의 친구가 되심으로 신분제도를 타파하신 개혁자이셨습니다.

개혁자이신 예수님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무슨 사랑인가요? 그저 아껴주고 감싸주는 감정적 사랑인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그분의 영광을 위한 열성과 타락한 인류를 위한 사랑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시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애를 지배하고 있었던 힘이었습니다.

탐욕과 부패로 얼룩진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억압 당하는 민중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민중을 선동하고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혁명가의 모습으로 밖에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외로운 개혁자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자신들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온갖 규범들을 만들어 백성을 속박하고, 민중은 그러한 지도자들을 맹신하는 이 멍에의 줄을 끊어 버리기 위한 예수님은 그 시대 혁명가이셨습니다. 가련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지도자들이 하나님의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심판하고 있으니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성으로 가득하신 예수님에게 의분이 생김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마지막 시대 예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들은 개혁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기독교회의 현실을 보십시오. 2,000여년 전 유대교회보다 더 타락하고 곪아 있는 상태가 되지는 않았나 겸손히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10만 성도와 1,000억대 재산을 가진 명성교회 담임목사가 아들목사에게 모든 권한을 세습했습니다. 취임식이 한창 진행되는 도중에 예배당 3층 좌석에 앉아 있던 한 신학생이 “위임식은 무효”라고 외치자 주변에 있던 교회 관계자 10여 명이 순식간에 달려들어 이 신학생의 입을 막고 머리채를 잡는 등 무력으로 진압하는 장면이 뉴스에 중계됐습니다. 교회 보안요원들은 이 학생을 예배당 밖으로 끌어낸 뒤에도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멱살을 잡는 행동을 계속했는데, 교회 안에서 벌어진 폭력적인 제압 상황이 전국에 중계되었습니다.

솔직히 이런 모습을 한두 번 봐온 것이 아니지요. 세습하는 교회가 어디 명성교회뿐이며, 이런 폭력이 어디 처음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부정부패가 하나의 관행이요 문화가 돼 버린 오늘날의 기독교계입니다.

타락한 교회를 향해 외치되 바리새인의 모습으로 하지 말고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 외쳐야 합니다. 그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열성으로 무너진 곳을 수보하는 마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누군가 그 일을 해야 한다면 내가 그 일을 하는 특권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함부로 정죄의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틀린 것을 그저 우리와 조금 다를 뿐이라고 말해서는 더더욱 안될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이라면, 외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로부터 오해받고 비난과 조롱을 받고 결국 죽음에 이를지라도 그것이 예수님을 진실로 따르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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