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21호 제3부: 율법주의(완전주의)를 피하는 길

제3부: 율법주의(완전주의)를 피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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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법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그리스도인들 중 많은 그리스도인이 율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집중하다가 다른 극단인 율법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율법주의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율법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율법주의는 무엇인가?

율법주의는 율법에 대한 문자적인 순종을 강조하는 도덕주의이며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모든 면에 완전함에 이르러야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는 완전주의입니다. 그것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를 믿는 신앙입니다. 도덕주의적인 완전은 사람의 모든 행위를 법 조항들로 규정하는데, 그것들은 매우 복잡한 것으로 식생활, 오락, 의복 등 삶의 모든 국면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완전에 대한 도덕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금욕, 자기학대, 식생활을 제한하거나 심지어 거세를 통해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모습을 개신교회와 로마 카톨릭 교회 모두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여러 규정의 긴 목록들을 만들며, 신앙의 연륜을 더해갈수록 그 목록의 길이는 점점 더 늘어납니다. 많은 바리새인과 수도승이 이러한 부류에 속하며, 현대의 몇몇 보수적인 기독교인들도 여기에 속합니다.

예수님과의 산 관계가 없이, 그리고 ‘율법’의 본질인 사랑의 마음이 없이 “완전하게 되려는” 노력은 바리새인적인 신앙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메마르고 냉혹하며 죽은 것이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신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의로운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행위를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하게 되는 이유는 매일매일 자신의 양심을 주님 앞에 펼쳐 놓고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기 스스로 열심히 살지만 하나님께 얼마나 큰 용서와 은혜를 입은 죄인인지 매일 인식하지 못할 때 율법주의자가 됩니다.

인간적인 노력으로 아무리 우리가 음식을 가려 먹고, 옷을 보수적으로 입어도 그런 인간적인 행위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바른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성경은 다음과 같이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딛 3:5)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위와 같은 말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받은 용서와 은혜가 너무 커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여 즐겨 순종하는 자와 바리새인 같은 율법주의자를 겉으로 드러난 행위로는 아무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기질 상 대범하고 자유로운 사람은 계획적이고 규칙을 준수하는 데 철저한 기질의 사람을 율법주의자라 오해할 수 있고 반대로 소심하고 철저한 성향의 사람은 반대 성향을 가진 사람을 자유주의자라고 잘못 판단하기 쉽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마음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을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여 분별해야 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에서 오늘날 율법주의자라는 단어를 생겨나게 한 바리새인들의 특징을 확인해봅시다.

바리새인은 자기의 품성을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에 비추어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품성에 견주어 판단하였습니다. 그는 사랑과 자비로 충만한 마음을 구하지 아니하고 외적 생애로 나타나는 신앙만으로 만족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의롭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할 것입니다. 그의 스스로 의롭다는 생각이 남을 비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 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로써 그는 형제를 참소하는 사탄의 정신을 나타냈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만과 자부심만큼 하나님께 가증스럽고 사람의 심령에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반대로 세리의 기도를 살펴봅시다.

세리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고, 자기 자신이 죄 많고 누추한 인간임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만한 아무런 공로도 없음을 알고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하고 외쳤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죄사함을 받고 마음에 화평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그의 유일한 간구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필요를 느끼고 우리의 궁핍과 죄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실 수 있는 첫째 조건입니다.

바리새인으로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게 막는 악이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을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에 의탁하는 겸비한 심령이 아닌 교만과 자부심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 없게 만드는 무섭고 절망적인 죄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은 볼 줄 모르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어버리므로 외형적인 행위에 치중하여야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우리로 통회하게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용서와 화평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죄에 대한 자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성령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만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상태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의를 그처럼 높이는 까닭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순결하심과 탁월하심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가난함과 결점들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모든 죄인과 마찬가지로 아무 소망도 없이 잃어버린 바 된 자들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구원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리의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은 그 기도가 전능하신 자를 붙잡으려는 의뢰심을 보여준 까닭입니다. 세리의 생각에는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수치스러운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은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과 같이 다른 사람도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 입장인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고소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또한 말씀을 들이대며 강요하거나 억압하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비울 수 없고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해 주시도록 그분께 자신의 마음을 허락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상대방 역시 그리스도만이 그를 고칠 수 있고 정결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그 사람을 맡겨야 합니다.

자아를 포기하는 일은 그리스도인 생애를 처음 시작할 때에만 할 것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매 발걸음마다 거듭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선행은 우리 자신 밖에서 오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찾는 일과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심령을 낮추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인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에만 우리는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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