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지 201-250 221호 제1부: 자유주의는 성경적인 복음인가?

제1부: 자유주의는 성경적인 복음인가?

59
0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의 글을 오해하여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되고 하나님의 법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율법 아래 있지 않음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법을 격하시키려고 애쓰는 다음과 같은 변론을 듣습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더는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견해일까요? 성경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순종하는 의무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인가요? 이것에 관한 성경절이 로마서 6장 14,15절에서 발견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얼마나 쉽게 혼란을 방지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을 한 다음에, “그런즉 어찌하리요?”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합니까?”라는 말입니다. 그의 대답에 유의해 보세요.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이 율법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오해함으로써, “은혜 아래 있으니 율법을 범해도 괜찮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바울은 이를 심히 염려하였기 때문에 덧붙여서 설명하기를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법을 범하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강력한 언어로 바울은 은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법을 범할 수 있는 면허증을 주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백만의 사람들은 바울의 분명한 경고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는 로마서 3장 19절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것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법을 범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정죄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들은 법을 범하지 않음으로써, 법에 의해 정죄당하지 않는 상태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요 은혜의 능력 아래 있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그의 논증에서, 바울은 은혜의 능력이 죄의 세력보다 훨씬 강하다는 진리를 지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은혜는 죄의 권세를 누르고 하나님의 법을 순종케 하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이 주는 죄책감과 그 정죄 아래 있지 않은 이유이며,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죄에 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한 살인자가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가정합시다. 형 집행 날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법 아래 있는 것이며, 죄책감 속에서, 정죄함 아래서, 사형 선고 하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형이 집행되기 하루 전에, 대통령이 이 죄수의 형편을 재검토하고 난 후, 용서해 주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대통령이 그 정상을 참작하여 자기의 권한을 이용해서 그 죄수를 완전히 석방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더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것입니다. 법이 더는 그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는 법률의 고소에 대하여 완전히 죄 없이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자유로이 걸어나갈 수 있으며 어느 경찰이라도 그를 체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은혜 아래 있고 더는 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해서 마음대로 법률을 깨뜨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는 용서를 받은 사람으로서 대통령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법률을 더 잘 순종할 의무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그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그 국가의 법을 조심스럽게 존중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 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여기에 모든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믿기 때문에 율법을 더는 소용없는 것으로 폐하는가 라고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자신의 질문에 대하여 그는 스스로 대답하고 있는데, 그것은 은혜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서는 율법이 세워지고 재강조된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여서 재차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순종하기를 피하려고 교묘히 이유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때문에 조금 더 이 문제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속도위반으로 경찰에게 붙들린 경험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 당황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경찰이 법규위반 보고서를 쓰고 있는 동안, 여러분이 정말 급한 사정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설득력 있게 경찰에게 호소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는 쓰고 있던 보고서 용지를 천천히 접더니 찢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좋습니다. 이번만큼은 용서해 드리지요. 그러나…” 이제 경찰이 말하는 “그러나…”라는 말에는 무슨 뜻이 내포되어 있을까요? 두말할 나위 없이 “그러나 다시는 속도 위반하면 안됩니다”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지요. 경찰의 이러한 용서(은혜)가 여러분에게 법을 불순종해도 좋다는 길을 열어 줍니까? 그 반대로 다시는 법을 어기지 않겠다는 결심을 강하게 재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할 것입니다.

 

순종은 사랑의 시금석

어떤 사람들은, 율법이 죄인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깨끗함을 받게 하는 목적을 달성한 후에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더는 법이 필요 없다는 반론을 제기할지 모릅니다. 그것이 사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고, 정결케 하는 예수의 십자가로 다시 인도해 주는 율법의 감시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점진적으로 성장해 가는 그리스도인 경험 가운데서 올바른 위치로 잡아주는 거울의 역할이 항상 필요로 느껴질 것입니다.

율법과 은혜는 서로 경쟁하면서 상대방을 없애기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협력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지적하고,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해 줍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둘의 참다운 관계를 잘 배합시킨 아름다운 성경 구절이 계시록 14장 12절입니다.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니라.” 믿음과 행함에 대한 얼마나 완전한 묘사입니까? 믿음과 행함의 아름다운 조화가 성도들 가운데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순종의 행위가 사랑의 참다운 테스트(시금석)입니다. 행함은 참된 그리스도인 임을 증명하는 증거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0). 어떤 남자도 입으로 하는 말로만 가지고 순수한 여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꽃을 주는 일도 없고, 헌신적인 행동도 없으며, 사랑의 선물도 없다면, 순결하고 지혜로운 처녀들은 그러한 남자의 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말과 공언하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참 증거는 순종입니다.

어떤 자동차들의 범퍼에 붙어 있는 스티커들은 얄팍한 사랑에 대한 관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미소를 지으세요”, “만일 당신이 예수를 사랑한다면 경적을 울리세요” 등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요한복음 14:1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미소나 손을 흔드는 것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이 사랑을 환영하지만, 그것이 생활 전체를 뒤흔들고 변화를 요구할 때에는 대다수가 거절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리를 찾지 않습니다. 그들은 쉽고 편안하고 안락한 종교 즉, 자신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길대로 살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확신을 줄 수 있는 종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는 참된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성경 말씀 가운데 하나가 요한일서 2장 4절입니다.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고.” 요한이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성경에서 가장 확고하고 깊게 수립된 진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여 주여” 하고 말하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살지 않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적들을 행한다고 주장하면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간청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슬픔 가운데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주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요,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경 저자들의 확고한 말씀은 분명하고 단순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순종하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주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요한이 우리에게 확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이리하여 우리는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과 순종하는 것이 어떻게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의 생애와는 뗄 수 없는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요일 5:3).

댓글 남기기

메시지를 입력해주세요.
이름을 입력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