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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믿는 것이 진실로 믿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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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나 지하철 역에서, 그리고 상점들 앞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분들이 쉽게 눈에 뜨인다. “예수 믿으세요?” “하나님 믿으십니까?” “믿고 천당 가세요!”

미국에서는 큰 길이나 하이웨이를 달려가다 보면 다음과 같은 간판의 글씨들을 종종 보게 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저 믿기만 하시오! 오늘 예수를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 드리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이 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으리라고 성경에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는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믿으라는 성경의 말씀을 받아 드렸으면, 같은 성경이 어떻게 믿으라는 말씀까지도 받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 보기로 하자.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또 그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주위의 이웃들과 친구들에게 여전히 좋지못한 감화를 변함없이 끼치며 살고 있는가? 우리 주위에서 교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가 수많은 십자가의 야광들이 밤거리들을 밝혀 주고 있지만, 정말 우리 주위의 삶이 더 깨끗하게 달라져 있는가? 더 정직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변화되고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질문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교인이라고 믿었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말을 간혹 접하게 된다. “저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내뱉는 말들을 가끔 듣게 된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정말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신자들에게서 비롯되는 일들이다. 믿을 때는 우리 마음에 어떠한 일이 일어 나게 되는 것이며, 어떠한 변화가 수반되게 되는 것인지를 제대로 가르침 받지 못한 신자들의 경우에, 자신의 생활에 진정한 변화없이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는 모순에서 발생되는 일들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마는 행함의 열매가 따르지 않으면 우리는 그 믿음을 참된 믿음이라고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씀을 제시하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한번은 가장 순수했던 초대 교회에 신학적인 위기가 발생한 적이 있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일부 교인들 가운데 오해가 발생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에 차질이 생기게 된 것이다. 사도 베드로께서 베드로 후서 3장 14절에 점도 흠도 없이 깨끗하게 되기를 힘쓰라고 강조한 다음에 그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필자 주)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베드로후서 3:15,16,17

오해된 사도 바울의 말씀들을 예로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4:5.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서 5:4. 위의 말씀들은 사도 바울이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거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책망하는 의미에서 기록한 말씀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의 말씀 때문에 잘못된 오해가 빚어질까봐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섞어가면서 기록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6:15, 1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 5:5,6,13. 초대 사도 교회 당시에 위와 같은 가르침의 위기가 왔을 때에 예루살렘 총회의 지도자로서 위치하고 있던 예수님의 형제였던 야고보는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써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하여 야고보서를 기록하게 되었고, 그는 자기의 편지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교회 안에 존재하게 된 오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하고 격려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서 2:14, 17-24

야고보의 말씀은 그 당시 교회 안에 오해된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균형지게 설명을 해 주고 있다. 그는 마귀도 하나님을 믿고 떨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마귀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정도의 믿음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의 인정과 동의를 지나서 우리의 마음과 사상과 생활을 바꾸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 하는데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우리에게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믿음과 행함과 구원의 삼각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아들 이삭을 낳기 이전에 자신과 자기의 아내 사라가 너무 늙어서 아이를 전혀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듬해에 다른 여인을 통해서가 아니라 늙은 자기의 본처 사라를 통하여서 아들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아들을 통하여서 택함 받은 한 나라를 이루시고 그를 통하여서 메시야를 이 땅에 탄생하게 하시겠다는 약속, 자기의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어 그 수가 하늘의 별 처럼 바다의 모래 처럼 많게 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그는 굳게 믿었다. 그것을 믿는 일은 엄청난 믿음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어 주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그저 머리로만 인정하고 동의한 것이 아니다. 믿음은 머리로 어떠한 사실이나 가르침을 인정하거나 동의하는 수준 이상을 의미한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 드린 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그 말씀대로 따라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었을 때에 자기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었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높아진 자”라는 뜻이었고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자식이 하나도 없던 아브라함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이름을 “열국의 아버지”라고 소개하고 다닌 사실은 굉장한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이삭이 태어나고 그가 20세가 되었을 때에 청천 벽력같은 말씀이 다시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다. 자기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죽여 제사로 바치라는 것이었다.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과연 그러한 명령을 하실 수가 있을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몹시 고민하여 떨었다.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 말씀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이삭을 아침 일찍 깨워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이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처럼 들릴 때에라도 믿고 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최선을 다 아시고 당신의 사랑과 뜻을 따라 행하신다는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드릴 때에는 그 분을 우리는 우리의 왕과 주인으로 받아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과 진리와 그 분의 모든 계명을 다 받아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칼을 들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멈추도록 명하시고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알았다고 말씀하여 주셨다. 그 감동적인 이야기는 창세기 22장에 잘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시험하셨던 것이다. 아울러 후 세대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여 주시기 위하여 그러한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것이었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러 주셨던 것이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바로 이 경험을 실례로 들어서 믿음이란 무었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는 아브라함이 믿음만 가지고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까지 강조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행함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가 없는 삼각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배를 저을 때에 한 쪽 노만 저으면 배가 제자리를 맴돌게 되는 것 처럼 믿음과 행함이 함께 병행하여야 구원의 배가 하늘 포구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행함으로가 아니지마는 동시에 성경은 다음과 같이 행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값아 주리라.” 마태복음 16: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로마서 2:6.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린도 후서 5:10)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요한계시록 2:23 여기에서 한가지 살피고 지나가야 할 문제가 한가지 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이땅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악하고 불순종하는 마음이 우리의 본 마음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 전서 5:17. 우리는 매일 자신이 하나님 안에서 죽고 매일 그리스도의 성령의 지배를 받아서 사는 경험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의 뜻과 율법을 지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힘으로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나를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주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 사랑이 강권하는 힘이 되어서 주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4:15).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순종이나 행함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의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지 우리의 행함의 쌓은 공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진리를 따라 깨끗하고 진실된 변화받은 생활을 살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참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을 낳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모를 순종하고 존경한다고 해서 그 부모의 자식이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 순종과 존경이 없는 사람은 그 부모의 자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부른다. 거기에서 사도 바울은 역대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의 믿음과 함께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는 행함도 동시에 적고 있는데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다고 하였다. 비를 본적이 없던 시대에,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가 온다는 사실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예비하기 위하여 그 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노아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은 조롱과 손가락질을 당하였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어디로 갈지를 몰랐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 우상의 땅을 떠나 나갔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 했다고 믿음 장은 기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가르침이 말틴 루터나 요한 웨슬레나 롸저 윌리암스, 리챠드 백스터, 요한 칼빈, 진센돌프 같은 훌륭한 종교 개혁자들이 살고 가르쳐 온 기별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믿기만하면 된다는 이상한 가르침이 기독교 안에 들어 와 꽤 판을 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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